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바티스트 콜베르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[[랭스]]의 부유한 [[상인]] 집안에서 태어났다. 전쟁장관이자 인척이었던 미셸 르텔리에(Michel le Tellier)의 중개로 관직에 진출했다. 이후 [[루이 13세]] 때 재상 [[쥘 마자랭]]에게 발탁되어 그 측근이 되었으며, [[루이 14세]]가 옥좌에 앉은 이후 재무장관 [[푸케#s-1]]의 독직 사건을 적발, 그를 징계하고 그 후임에 올랐다. 그는 재무장관이었지만 재정 이외에도 상공업 · 농업 · 토목 · [[식민지|식민]] 문제 · 해군의 업무를 담당, 거의 [[재상]]과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. 특히 [[경제]] 개혁에 주력해 [[중상주의]] 정책을 추진하여 [[국부]]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. 당시 모든 [[유럽]] 국가들의 [[금]], [[은]] 보유량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국부를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중상주의에 바탕을 두고 [[무역]]을 통하여 금, 은의 보유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며,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자국의 상선을 증가시키는 한편, 국내 생산을 부흥시켜 수출 진흥에 힘썼다. 프랑스령 [[캐나다]] 식민지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된 것도 콜베르 덕분이다. 하지만 [[중상주의]]적 관점에서 캐나다 식민지를 취급했기 때문에 큰 성장은 하지 못했다. 프랑스 사람들에게 캐나다 식민지는 매력있는 땅이 아니었다. 날씨 따뜻하고 먹을것도 풍족한 프랑스에 비해 캐나다 식민지는 춥고 먹을 것도 부족했던 땅이었다. 캐나다 식민지를 부유하게 한 모피 무역은 콜베르 사후에 활발해졌지만, 그래도 프랑스 본국으로부터의 유입 인구는 적었다. 인구로 보면 1650년의 인구가 200명이었는데 1750년이 되어서야 1만명을 찍었다. 또한 [[길드]]의 재편성을 단행하고, 왕립제작소를 창설하여 공업을 육성하였다.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물질적으로는 도움이 된 반면 심한 규제로 상업발전를 저해하였으므로 1670년경부터는 차차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, 1683년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